무사가 자신의 배를 가를 때 - 로닌 : 자아 분열을 이기는 영웅
사지가 없는 빌리는 형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그만 자기도 모르게 염동력을 사용해 형을 죽이고 만다. 어머니는 빌리를 향해 '너는 괴물이야'라고 말한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아닌가. 빌리가 사지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가 가진 능력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친형제를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눈앞에서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면 제 아무리 배아파 낳은 자식이라 할 지라도 '괴물'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사람에겐 육체적인 죽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인 죽음이 있다. 빌리에 대한 형의 괴롭힘은 일종의 정신적인 살인이다. 정신적인 살인을 인정한다면 빌리의 어머니는 죽은 빌리의 형에게도 '괴물'이라고 불렀어야 했을 것이다.
낳아준 어머니에게서 쫒겨난 빌리는 새로운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 어머니는 바로 유기컴퓨터인 '버고'. 빌리는 버고가 '자궁'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버고와 탯줄로 연결되어 의사소통을 한다. 빌리는 버고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버고는 빌리의 정신세계를 읽어나가며 인간을 배운다. 컴퓨터에 불과하던 버고가 모성애를 보이고 풍부한 감성을 지니기 시작한 것도 빌리를 자궁에 들이고부터였다. 버고는 탯줄을 통해서 빌리의 꿈과 빌리의 내면 깊은 곳에 응어리져있는 잠재된 욕망을 읽어들인다.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지고 자유롭게 세상을 다니고 싶은 소망도 있었고, 자신을 조롱하고 외면했던 세상에 대한 분노도 있었다. 가장 가까이 지내는 케이시에 대한 성적 욕망도 있었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의 조그만 아기에게 팔과 다리가 자라나듯. 이 곳에서 빌리는 유기컴퓨터가 만든 인공 팔다리를 염동력으로 조종하며 테스트하는 일을 한다.
빌리와 버고가 나누는 대화는 마치 아기와 어머니의 대화같았다. 빌리가 힘들어하면 컴퓨터 어머니인 버고는 자장가를 들려주면서 빌리가 편안히 잘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빌리는 눈을 감을 때마다 아가트를 죽이고 주군의 복수를 하는 로닌을 꿈꾼다. 아가트에게서 피를 먹는 검을 훔쳐 숨기고 있던 주군은 파괴본능을 숨긴 채로 유기 컴퓨터 테스터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현재의 빌리의 모습이다. 로닌은 그런 빌리를 보호하는 빌리의 또 다른 자아다. 어느날 아가트가 주군을 죽이고 피를 먹는 검을 되찾아간다. 아가트는 빌리의 잠재된 욕망들. 그가 갖고 있는 파괴적인 염동력을 사용해 세상에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파괴를 자행하게 만드는 욕망이다. 빌리에게 내려진 계시는 피를 먹는 검을 사용해서 아가트를 죽여야 한다는 것. 하지만 피를 먹는 검으로 아가트를 죽이기 위해선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려야 한다. 즉 빌리 자신의 또다른 자아인 로닌을 죽여야만 아가트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로닌은 이렇게 우리가 흔히 슈퍼히어로물에서 접할 수 있는 자아분열의 영웅을 특이한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슈퍼영웅들이 꿈을 통해서 또다른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드물지 않다. 브루스 배너 박사는 날마다 헐크로 변한 자신이 폭주하는 꿈을 꾼다. 브루스 웨인은 자기의 또다른 자아인 배트맨이 자신을 집어삼켜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항상 시달린다. 울버린은 잊어버린 과거의 자신에 대한 기억과 간헐적으로 맞닥뜨릴때마다 고통받는다.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은 그들의 굳건한 의지력으로 억누르고 있던 잠재된 욕망들이 그들의 '복제인간'들을 통해 파괴적으로 분출되어버린다. 이렇게 본다면 로닌과 아가트는 슈퍼맨과 비자로, 혹은 스파이더맨과 베놈처럼 슈퍼영웅의 빛과 어둠에 해당된다.
조셉켐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 보면,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다. "어머니가 항상 자비로운 것만은 아니다. 1) 우리가 공격적인 환상을 투사하고 그러면서도 반격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무심하거나 이르기 어려운 어머니도 있고, 2)구속하고, 금지하고, 벌주는 어머니도 있으며, 3) 자기에게 묶어두기 위해 아이의 성장을 싫어하는 어머니도 있고, 4)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위험한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거세 콤플렉스), 바라던 어머니이긴 하나 가까이해서는 안 될 어머니도 있다(오이디포스 콤플렉스). 따라서 어머니 중에는 성인의 유아기 기억이라는 은밀한 곳에 숨어있다가 때로는 엄청난 힘을 행사하는 나쁜 어머니도 있다. 이런 어머니는 아르테미스처럼 우아하면서도 고약한 여신으로 존재한다. 아르테미스가 젊은 사냥꾼 악타이온을 철저하게 파멸시킨 예는 정신과 육체의 차단된 욕망의 상징 안에 얼마나 엄청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빌리의 어머니 역할을 하는 버고는 빌리에게 자상하며 그를 보호하려는 듯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더이상 유기컴퓨터가 아니라 유기체인 인간과 같은 하나의 생명체로 탄생하기 위해 빌리의 힘을 악용한다. 버고는 빌리에게 로닌의 환상을 보여주고 아가트를 무찌르라는 암시를 주고, 그를 폭주토록 하여 지상으로 내보낸다. 버고는 로닌을 출산함으로써 자신의 계획의 2단계를 완성시킨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맨 처음 찾는 것은 어머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자궁을 뚫고 나온 빌리의 또다른 자아인 로닌은 '타치'(大刀:사무라이의 검)라는 말을 맨 처음 내뱉는다. 안전한 어머니의 자궁은 이제 없고, 빌리는 세상의 한 복판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한다. 빌리의 수호자인 로닌은 본능적으로 '검'을 찾는다. '검'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언제 폭주할 지 모르는 빌리(아가트)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도구이기도 하다.
로닌의 짧은 모험이 시작되고, 지하세계로의 시험을 거치는 영웅담처럼 하수구 깊은 곳에서 사람의 팔다리를 뜯어먹고 사는 괴물들을 만나기도 한다.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도 구해주고, 그녀를 품에 안기도 한다. 아마 이 짧은 여정에서 몇몇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하고 사랑을 나누면서, 로닌은 비록 하수구같이 더럽고 추할지라도 거기에 있는 약간의 희망을 본듯하다. 그가 본 세상이 절망적이었다면, 그는 언제라도 버고의 계획에 동참하고 버고의 뜻대로 로봇군단을 만들어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니까. 버고는 로닌이 결코 아가트를 이길 수 없다고 믿었다. 애초에 버고가 계획했던대로 빌리는 로닌으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각성을 하는데 성공했고, 버고는 그런 로닌을 다시 자신의 자궁에 품을 수 있었다. 이제는 온순한 빌리가 아니라 아가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로닌의 힘으로 버고는 세계의 지배자요 새로운 신인류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게된 것이었다. (아가트는 로닌의 파괴적 자아이기도 하지만, 로닌의 입장에서 아가트는 이 세상에 어둠을 가져와 수백년간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령. 즉 지금의 인류와 그 지도자들에 해당되었으니. 스스로는 아가트를 무찌른다 믿었지만, 결국은 스스로 아가트가 되어 세상을 집어삼키는 꼴이 되는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버고와 합체한 로닌은 마지막으로 인류를 말살하고, 새로운 유기컴퓨터의 지성으로 구성된 신인류를 탄생시킬 계획에 동참을 하게 되는가 싶었는데. 여기서 한가지 변수가 발생한다. 그것은 사라진 줄 알았던 피의 검. 이 이야기에서 피의 검은 바로 케이시다. '타치'를 찾던 로닌은 '케이시'를 찾고 '케이시'와 하나가 되면서 무사도의 극치인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되고, 케이시를 통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그의 또다른 자아인 아가트를 물리친다. 이로써 로닌은 다시한번 나쁜 어머니 '버고'의 자궁을 깨고 세상으로 뛰쳐나온다. 마지막 순간 엄청난 대폭발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아가트를 물리친 영웅의 모습으로 케이시 앞에 서게 된다.
그림자에 불과했던 '이름없는 무사' 로닌은 용기있는 할복으로 자신의 명예를 지켰고, 이제는 '로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앞에 우뚝 설수 있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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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0 21:40 [수정/삭제] [답글]
캬 로닌 좋죠.
처음 읽고 이해안됐을때 부머님 블로그에서 이 글 읽고 다시 책을 봤더랬을때 정말 반했드랬죠
2009/11/12 15:55 [수정/삭제] [답글]
그 다음엔 어떻게 됐을까요? 근처 히어로 그룹에 가입이라도...
프랭크밀러 사람 깜짝놀라게 하는 작품을 지어놨음.
2009/11/12 17:29 [수정/삭제] [답글]
집에 있는 로닌 다시 꺼내서 봐야겠어요^^
2009/11/16 19:41 [수정/삭제] [답글]
혹시 어딘가의 글을 번역한 건가요? 자체 내용만 두고 봤을 땐 살짝 확대해서 의미 부여를 한 부분도 있는 글이네요..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글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는 한, 작품 이해 부분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선입견을 갖고 읽게 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